내 속에 있는 사울...! 사무엘상 13:13-14
좋은 날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사무엘상 13, 14, 15장에 나온 ‘내 속에 있는 사울의 모습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으로] 오늘 본문이 그 첫 번째 사건으로 사울 임금이 40세에 왕으로 즉위한 지 2년 만에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된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전투에 있어서 사울은 두 번의 실수를 했습니다. 첫 번째 실수는 그가 스스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과 사무엘을 무시하고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긴박한 순간입니다. 백성은 불안에 떨고 있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점차 이탈하고 있습니다. 오기로 했던 사무엘은 7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황이 위급해 지자 사울은 자기가 제사를 주도해 드렸고, 그 순간 사무엘이 나타났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향한 멸망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지 2년 만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왜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었을까요? 그에게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먼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월권행위에 있습니다. 전쟁에 출정하기 전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확인하여 전쟁을 수행하곤 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레를 기다리라"고 지시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테스트해 보신 것이었습니다. 그 이레가 지나고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비로소 전쟁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되어도 아직 사무엘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사울은 더더욱 초조해졌습니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 현상이 시간이 갈수록 더 심화 되는 때라 더욱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군대는 "믹마스" 즉 원래 사울의 상비군이 지키고 있던 전술의 요충지를 이미 점령해 버리고 더욱 위협을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판단하기를 "어찌하든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제사를 먼저 드려야만 하겠다고 자기 딴에는 기특한 자세를 지킨다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사울에게는 그렇게 비상 수단으로 번제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음을 정당화시킬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사울은 "번제와 화목제를 이리로 가져오라"고 지시하고는 자기 자신이 제사장 노릇을 하면서 번제를 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번제가 막 끝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경솔히 행한 일을 보고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질책하자 사울은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그랬다고 변명했습니다. 즉 사울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나름 대로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번제 드리는 때를 늦출수록 탈주병이 늘어나 병력이 더욱 약해져 가고 있는데도, 그 번제를 드려 주려고 했던 사무엘은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제사가 제사 이외의 용도, 즉 백성들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사울은 의도적으로 제사를 집례했습니다.
사사요 제사장인 사무엘이 드려야 할 제사를 ‘왕’이 드렸다고 해서 그것이 큰 죄냐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문제요,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큰 죄가 될까요? 왕위를 박탈당하는 데까지는 좀 부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늦게 나타난 쪽은 사무엘입니다. 소위 원인 제공자는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상황이 위급한 순간이므로 정상참작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사울에게 멸망을 선포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사울의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왕을 요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일로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 되신 독특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보다 이방과 같은 보이는 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처럼 왕을 허락하시지만, 사실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방 왕과 겉모양은 비슷하나 그 속은 완전히 다른 왕을 세우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비록 왕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실제 왕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윗은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명목상 왕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왕이요 자신은 그 왕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신앙에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어떠합니까? 그가 했던 잘못은 단순한 실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울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방 왕과 같은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기에 사울에게 있어 성공의 차원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에게 있어 성공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전쟁에 이기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대하신 성공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기다리고 준행하는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던진 중차대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너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도대체 무엇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 앞에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13-14절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여기 13-14절에 강조되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13절에 나와 있는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않았고, 14절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어겼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의 자리, 지위’가 어떠한가? 하는 사실을 묵상하게 됩니다. 고대 국가들의 왕은 그 ‘왕’ 스스로가 ‘신’이고 ‘초법적인 존재’요 ‘절대 권력’을 쥔, 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의 자리, 왕의 지위는 무엇입니까? 사울이 아무리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사울은 ‘명령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왕을 세운 주인이다’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깨지면 왕은 왕의 자리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왕의 위치입니다. 그렇다면 ‘사울 왕’이 마땅히 사무엘 제사장이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사’를 드렸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서 명령을 받는 자리를 벗어나 자기 힘으로 백성을 제어하려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사울이 사기 진작용 번제를 드린 것은 하나님은 사라지고 인간의 목적을 위해 제정된 예배를 드렸기때문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섬기는 예배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드려진 가장 악독한 우상숭배가 됩니다. 여러분! 예배는 인간의 진지함이 아니라 진리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진리 되신 하나님을 통해 세워지지 않은 모든 예배는 잘못된 예배이며, 우상숭배가 됩니다. 예배의 실패자는 결국 하나님 앞에 실패자가 되는 무서운 결과를 맞게 됩니다. 예배는 마음의 문제 이전에 권위의 문제임을 명심하십시오. 레위기 10장 1-3절에는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이상한 불을 하나님께 드리다가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진지하였고, 어떻게든 하나님의 불을 피우고자 열정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방법이 아닌 자신들의 방법, 자신이 기획한 형식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혹시 이 시간 여러분 안에도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는 권위의 문제입니다. 마음은 그 권위가 행해지고 난 뒤에 나타난 우리의 반응입니다. 이게 바로 사울이 범한 죄입니다. 또한 사울의 문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함께 살펴보아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무엘상 4:2-11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왕 위에 오르기 전의 일입니다. 이때도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가 4천 명이나 죽게 되고, 전세는 계속 밀려 이러다가는 도무지 벗어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장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그래서 이스라엘 병영으로 ‘언약궤’가 도착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병영에 도착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천군만마를 얻는 듯했습니다. 여러분! ‘언약궤’는 곧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도 알고 있었고 적군 블레셋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 달리 ‘언약궤’가 도착한 이후 전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언약궤’가 있기 전 4천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면 ‘언약궤’가 도착한 후에는 ‘보병 삼만 명이 죽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스하스도 이 때 전사’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사울 왕이 드렸던 제사와 동일한 사건입니다. ‘언약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나 ‘예배’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사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 없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 하나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 하나로, 언약궤를 모셔 왔다는 것 하나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역전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주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언약궤가 모셔져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며, 그 뜻을 좇아가야만 하는 존재들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제어하고 우리 입맛대로 그분을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도 하나님의 힘만을 빌려올 수 있다고 믿은 것이 ‘언약궤 사건’이고, 지금 사울이 ‘제사를 드린 사건’입니다.(광화문!)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무엘상 13장에 나오는 사울 왕의 첫 번째 실수를 살펴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기가 먼저 제사를 드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고, 사울은 제사를 드렸는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제사’를 하나의 ‘요식 행위’ 정도로써, 조금 더 나쁘게 말하면, ‘주술적인 의미’로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사’라는 것은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들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신앙고백이며, 하나님께 뜻을 물어 순종하고자 하는 행위여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뜻을 세우고 자기의 결정을 위해서 하나님이나, 제사를 이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술’ 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울의 실수를 오늘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예배나 기도를 드린다는 의미는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상충 될 때,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조율한다’는 의미이고,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다.’는 의미인데, 예배를 드리고도, 기도를 드리고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관철 시키려는 ‘수단’이라면, 그것은 사울이 범한 실수와 동일한 ‘요식 행위이거나 주술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사울의 실수, 신앙의 기본기에 있어서 잘못된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신앙은 누구의 열심인가?’ 하는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열심으로’ 신앙이 시작되고, 여기까지 이르렀는지, 아니면 ‘하나님 그분의 열심으로 신앙이 시작되고 여기까지 이르렀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내 신앙은 ‘내가’ 시작한 것 같고, ‘내 열심, 내 헌신으로’ 여기까지 이르렀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수없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문제는 지금도 ‘내 열심으로 늘 주님께 불순종했고, 주님을 거역했으며, 주님께 반항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 ‘하나님 그분의 열심’으로 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격이나 조건, 우리의 공로’는 없습니다. 0.0000000001%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입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이 되셔서 주님의 영광 안에 능치 못함이 없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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